MD in the Antarctica

< 의협신문 인터뷰 원문>

카메라를 부끄러워 하는 웨델해표(바다표범)

남극에 가기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내재된 도전정신이 새로운 길로 인도합니다. 그 길을 따랐을 뿐입니다. 적절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한국인이라면 남극에 세종과학기지(이하 세종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번쯤은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성장하고 각자의 삶을 개척하면서 마음속에 있던 세종기지가 점점 작아져서 느낄수 없거나 내가 걷는 길에서 너무 멀어져서 다른이에게 양보하게 되는 것이죠.

한때 저 역시 세종기지와 먼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축설계, 요트운영을 비롯하여 창업까지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길을 지나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 한구석에 꺼져가는 작은 촛불처럼 흔들리던 불꽃이 다시 타올랐습니다. 세종기지는 그렇게 다시 가슴속에 나타났습니다. 

세종기지는 연구자들 외에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방문합니다. 남극의 여름에는 단순히 기지의 유지보수를 위해 오기도 합니다. 요리사의 옆에서 재료를 다듬거나, 펭귄의 똥만 모으기도 합니다. 남극의 얼음을 녹이지 않고 한국으로 보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남극생활은 겨울을 지내는 것이죠. 배관수리와 용접기술을 요하는 유지보수 분야도 있고, 생물학 및 대기과학 등의 연구분야도 있습니다. 그 중 한명이 바로 의사입니다. 남극에 가기 위한 가장 확실하면서도 쉬운 방법이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도전과 모험은 저를 관통하는 키워드 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기도, 도저히 스스로 일어나기 힘들 것 같은 절망도 있었지만, 결국은 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였습니다. 

퇴근하는 월동대원


의사가 되기 위해 남극에 왔습니다.

각자 삶의 지향이 있습니다. 나의 욕구, 타인의 욕구, 공동체의 발전, 인류의 평화 등, 그 수준과 방향은 다양하지만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 입니다. 의과대학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치열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기에, 스스로 결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소비를 지탱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꺼져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본질적인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치의 경중을 따질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자본주의의 경제적 유인력이 소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1년간의 남극생활은 의사에게 결코 이득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사로서의 경력과 전문적 진료 경험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극 근무를 지원하는 의사는 많지 않습니다. 공중보건의에서 자체선발로 바뀐 후, 50대 이하 지원자는 거의 없습니다. 한창 자기 영역과 가정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있을 시기에, 남극으로 떠나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결정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중차대한 결정입니다. 

그렇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 남극에 왔습니다. 함께 겨울을 지내는 동안 소수의 월동대원은 외부와 단절된채로 약 9개월(3~11월)을 보내야 합니다. 그들의 유일한 의사가 되기위해 남극에 왔습니다. 이곳에서 피가나면 멈추게 할 사람은 의사입니다. 날카로운 남극의 돌밭을 걷다가 넘어져 찢어지면 최대한 흉이 지지 않게 치료해줄 사람도 의사입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 생명의 사선을 넘나들때 조금이라도 그의 시간을 연장해줄 사람이 바로 의사입니다. 의사로서의 능력을 1년 내내 발휘하지 않는것이 가장 최선이지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거의 모두에게 찾아왔고, 그들을 어루만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의를 품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저의 작은 소망이었을 뿐입니다.

겨울에만 접근 가능한 언 바다위 빙벽


남극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

매년 3~4월에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문 옆에 붙어있는 월동연구대 모집공고를 볼 수 있습니다. 신문에도 몇번 광고가 나오고 관련분야의 협회에 공지가 나오기도 합니다. 의사도 비슷합니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선발과 채용과정을 가천대 길병원에서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2015년 까지는 공중보건의가 1년씩 파견되었지만, 이후부터는 길병원을 통해서 파견을 받고 있습니다. 길병원 직원을 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면허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 가능하고, 길병원은 선발과정에서 서류와 면접전형을 진행하고 협진과 자문을 담당합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연락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길병원 홍보팀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인사팀과 이야기를 하였고, 4월즈음에 정식공고가 날테니 기다려 달라는 말을 들었죠. 모집공고는 길병원과 극지연구소 채용안내 페이지에 모두 올라왔습니다. 지원을 했고, 면접을 보았고, 6월 말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남극에는 2개의 대한민국 과학기지가 있습니다. 1988년부터 운영중인 세종기지와 2014년부터 운영중인 장보고기지입니다. 두개의 기지는 남극이라는 사실 하나만 같을 뿐, 모든 면에서 상이합니다. 세종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남극대륙은 약 180km 떨어져 있습니다. 그나마 남극대륙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나온 반도끝까지의 거리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두 번째 남극기지인 장보고기지는 남극대륙 본토에 건설했고, 한겨울이 되면 외부와 교류가 완전히 차단됩니다. 세종기지는 한겨울에도 비상수단을 이용한 외부출입이 가능합니다. 다만, 가능할 뿐이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기에 큰 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장보고기지는 외과계 전문의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전신마취를 포함한 응급수술까지 진행할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이 마련되어 있죠. 하지만, 세종기지의 의사는 기본적인 건강관리와 진료 및 후송필요성을 판단하고 후송시까지의 관리를 하는 역할입니다. 외과계 전문의를 비롯하여 일반의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10개월을 돌아보면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오셔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몸의 아픔은 의약품과 재료들로 손봐줄 수 있지만 마음의 아픔은 어루만지기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서 대원들의 마음을 돌보아 주려 했습니다.

세종기지의 정식 파견기간은 매년 10월말부터 다음해 12월까지 약 13.5개월 입니다. 장보고기지는 1개월 먼저 시작합니다. 9~10월에 시작하다 보니, 수련중인 인턴이나 전공의는 상당한 부담을 안고 결정해야 합니다. 봉직의는 길병원과 정식 고용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기존에 일하던 병원과 상의가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필요한 것은 본인의 결심과 가족의 응원 인 것 같네요.

빙벽/구름/유빙/체육관


남극의 의사생활

하계연구원들이 모두 나간 3월부터 9개월의 월동기간은 남은 대원들에게 긴 고독의 시간입니다.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다들 많은 고민을 하고 계획을 세워 오지만, 모든 계획을 완수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대원들의 여가시간을 위한 몇가지 소소한 것 들을 준비했습니다. 레고클래식 블럭세트와 닌텐도 스위치입니다. 여러명이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공용공간에 두어서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런 소소한 완구류는 공용비품으로 구매하기 애매한 점이 있죠. 그래서 미리 구입해서 개인적으로 가져왔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의사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원이라면 누구나, 아니, 대원이 아니더라도 제 곁에 있으면 24시간 의사의 관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라도 궁금한게 생기면 바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밤에 함께 모여 영화를 보다가 장면에 대한 의학적인 의문이 생기면 즉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많이 알려주려 했습니다. Uptodate를 개인적으로 구독, patient education을 매일같이 보면서 흥미롭거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 알려주려 했죠. 평일 아침에 다같이 모여 회의를 하는 시간이 있는데, 매주 월요일 아침에 중요한 의학지식들을 간단히 요약하여 전달해 주었습니다. NEJM이나 BMJ에 나온 article중에서 의미가 있거나 같이알면 좋은 내용(예, 헬리코박터 제균치료와 위암발생률, 자궁경부암 백신의 효과 등)은 더 공부하기 원하는 몇명만 따로 모여 같이 리뷰하기도 했죠. 세종기지 월동대원의 약 절반은 연구원이며 그들은 지식추구에 대한 욕구가 상당합니다.

바다/유빙/얼음/땅


세종기지에는 자체적인 생활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기계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승합차 크기의 발전기가 24시간 가동되면서 기지내에 전기를 공급하고, 눈 녹은 물이 모여있는 호수에서 여러대의 펌프가 서로 연계되어 쉼 없이 물을 공급합니다. 사용한 오폐수는 큰 정화조와 특수처리장치를 통과해야 바다로 배출할 수 있습니다. 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이면 거대한 중장비와 굴착기들이 눈을 치울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심하고 주의해도 다치는 경우가 생기고 의사가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평소에는 의사양반 내지는 닥터로 불리지만, 역시 의사는 아플때 의사선생님이 되죠. 이학적 검사와 기초적인 영상의학적 검사를 하고 간단한 봉합이나 소소한 약처방도 실시합니다. 

좀 더 큰일이 생긴다면 개입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극지연구소와의 협약을 통해 가천대 길병원이 1차 백업을 맡고 있습니다. 세종기지는 한국보다 12시간이 느립니다. 한국의 밤 10시는 세종기지의 아침 10시죠. 도움이 필요할때는 길병원 응급의학과 핫라인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절차를 거치면 해당과 전문의와 협의하거나 자문을 구할수도 있죠. 심전도 검사를 시행하고 판독을 의뢰하거나, X-ray 또는 초음파 촬영에 대한 소견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기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고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수 없다면, 남극과 가장 가까운 문명세계로 후송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과 자원이 필요합니다. 극지연구소, 해양수산부, 외교부와 필요시 국방부까지 함께 나서서 환자의 빠른 후송과 회복을 돕게 됩니다. 분초를 다투는 심뇌혈관 질환에는 현실적인 제한이 있지만, 2-3일의 시간이 주어지는 아급성 중증질환은 수십억원의 예비비를 투입하여 계획에 없던 항공기와 인력을 보내 최대한 빠르게 칠레로 후송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Thoracic outlet syndrome으로 의심되는 대원을 긴급히 후송한 사례가 있습니다. 중증은 아니지만, 정밀한 검진과 진단이 필요한 경우에는 계획된 비행일정에 맞추어 칠레로 후송합니다. 날씨가 가장 큰 변수입니다. 남극의 바람과 안개는 1시간 전과 후가 다를때가 많습니다. 칠레를 출발해서 킹조지섬 상공까지 왔던 수송기가 활주로 근처에만 머물던 안개로 인해 다시 돌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10km 바다건너편 세종기지는 파란하늘에 햇볕이 쨍쨍해서, 안개 위에서 빙빙 돌던 수송기를 눈으로 볼 수 있었죠.

친구들과 동료들도 든든한 백업입니다. 잠깐만 상상을 해 볼까요? 새벽 3시에, 남극에 갔다는 친구의사에게 5년만에 전화가 걸려와서 잠에서 깼습니다. 그 친구는 왜 전화를 했을까요? 펭귄에게서 새우깡맛 닭똥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남극에도 비가 온다는 놀라움을 알리기 위해? 아마도 전화기에 찍힌 친구의사 이름을 보면서,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할 것입니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그렇습니다. 안과적 응급질환의 감별에 조언을 받기 위해 미안함을 무릅쓰고 안과전문의 친구에게 전화를 한 것이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전화가 걸려오는 시간과 그 위중함의 관계를 말이죠. 기지에 있는 의사는 1명 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젠투펭귄


신체적인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 해도 본인의 신체에 국한됩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문제는 기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18명의 월동대원은 모두가 다른곳에서 다양한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던 개성적인 사람들 입니다. 남극에 도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느정도의 정신적 기반은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고립된 곳에서의 장기간 생활과 거기서 생기는 마찰은 자신도 모르는 내재된 아픔을 서서히 불러옵니다. 겨울이 되어 해가 10시에 뜨고 14시에 지면, 길고 긴 밤동안 신경이 날카로워 지지만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자기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별 것 아닌 의견차이가 마른장작에 닿은 촛불처럼 거세게 모두를 삼킬 수 있습니다. 

가장 최선은 모두가 하나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겠지만, 천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일입니다. 차선은, 의사가 최대한 빨리 알아채는 것이겠죠. 그러려면 대원들이 의사를 믿어야 합니다. 아니, 의사가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든 털어놓으면 내 말을 들어준다는 생각, 내가 한 말이 다른사람에게 절대 퍼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대원 각자의 마음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참 어려운 일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모두와 트러블 없이 지내려 정말 노력했습니다. 매월 하는 신체적 검진과 더불어, 격월로 심층상담을 30분 이상 진행했습니다. 대원들이 처음에는 형식적으로 하는 상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형식적인 이야기만 하는 대원도 있습니다만, 덕분에 대원 각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살피고, 신뢰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어둡고 무서운 이미지가 많은 분야인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남극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이기도 합니다. 

가까이 다가간 빙벽


코로나 판데믹 이전에는 킹조지섬의 다른 기지의사들과 활발한 교류활동을 이어 왔습니다. 다른 기지에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메신저로 각자의 의견을 나누었고, 손이 필요할때는 해당 기지로 이동하여 함께 진료나 수술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판데믹 이후, 각 기지간 교류가 금지되면서 의료 교류활동도 중단되었지만, 메신저를 이용한 ‘협진’이 가끔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타국기지에서 급성복증이 발생해서 세종기지의 진단기기와 의약품을 사용할 준비를 하였으나, 항공편 확보가 더 빨리 이루어지면서 바로 칠레로 내보내는 상황도 있었고, 인력 입출과정에서 인근기지에 의약품을 전달해 주기도 했습니다. 서서히 예전처럼 만나서 인사도 하고 필요할때 도움도 주는 시기가 다시 오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을겁니다. 한가지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면 ‘현재 남극에 있는 전세계 월동 의사들의 메신저 대화방’의 존재랍니다. 의사들의 메신저라고 크게 다를것은 없고, 펭귄, 오로라, 빙하, 물개사진들이 가득합니다. 저도 한몫 하고 있죠.

세종기지의 의료행위는 법적 경계선을 넘나들기도 합니다. 의료법 제33조를 보면 의사는 개설된 의료기관을 통해 의료행위를 시행해야 합니다. 세종기지는 의료기관이 아닙니다. 길병원에서 파견된 의사는 고용관계가 길병원과 맺어졌을 뿐이지, 의료기관 외부에서 1년 넘게 진료를 하게 됩니다. 다만, 33조의 예외항목에서 ‘그 밖에 이 법 또는 다른 법령의 특별히 정한 경우나 환자가 있는 현장에서 진료를 하여야 하는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할 뿐입니다. 1988년도에 1개였던 남극기지는 2014년에 장보고기지가 추가되었고 향후 남극내륙에 세번째 기지가 마련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좀 더 명확한 법적 근거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스릴을 즐기는 자이언트 패트럴


남극의 의사는 의사이기도 하고, 월동대원이기도 합니다. 밤새 눈이 내리면, 아침에 다 같이 나가서 중장비가 치우지 못하는 곳을 정리해야 합니다. 창고에 쌓인 물품을 꺼내어 기한을 확인하고 재분류한 후 다시 깔끔하게 정리하는 작업도 함께 합니다. 멀리 비상대피소를 수리하러 갈 때 짐을 나누어서 한시간여를 걸어갑니다. 배를 타고 차가운 남극바다에 젖으면서 상륙해야 하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일할때는 모든것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의사가 모든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봉합세트를 미리 만들어서 멸균처리해 두어야 환자가 발생했을때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취주사, 봉합실, 반창고도 모두 직접 챙겨야 하죠.

그렇지만 남극이기에 가능한, 남극에서만 할수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겁쟁이 펭귄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멀찌감치 서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우리는 펭귄을 신기해하는데 말이죠. 바다표범과 물개들이 눈밭에 올라와 잠자는 모습을 보면 거대한 빙수위에 빙수떡이 올려진 것 같습니다. 펭귄을 육상에서 보면 귀엽고 느린 꼬마아이처럼 보이지만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날쎈돌이 슈퍼펭귄이 됩니다. 고무보트가 최고속력으로 달릴때 펭귄들이 옆으로 다가와서 함께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 이곳이 남극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은근히 많이 받은 질문에 미리 답해드리자면, 북극곰은 남극에 없답니다. 참고하세요!) 날개를 펼치면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새들이 바다위를 스칠듯이 날아갑니다. 날씨가 좋은 밤에는, 우주가 쏟아져 내릴듯한 은하수와 별들이 나에게 전해집니다. 세종기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장보고기지에서는 오로라가 하늘을 장식합니다. 남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남극의 무지개


만약, 남극에 가기로 결심했다면, 제가 추천하는 리스트를 참고하세요! 1)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머신을 챙겨가세요. 고성능 컴퓨터와 전문적인 조종기세트를 준비하세요. 정말정말 시간이 많습니다. 꾸준히 연습하면 남극생활이 끝날때쯤 경비행기를 조종할 실력이 완성되어 있을거에요. 2) 천체사진 촬영을 위한 장비를 준비하세요. 사실, 남극에서 맑은 하늘을 저녁에 볼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열린 그 순간, 준비된 자만이 원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적도의가 있다면 더욱 완벽한 사진을 포착할 수 있을거에요. 3) 다른 대원을 위한 생일선물을 미리 준비하세요. 남극에 한번 들어오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은 구할 수 없습니다. 머그컵, 사진액자, 소소한 기념품 등을 가져오면 깜짝선물로 사용할 수 있죠. 외국기지와 교류할때 선물교환에도 좋답니다. 아쉽게도 저는 세가지 모두 준비하지 못했답니다.

이제 월동대원과 함께한 1년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조용히 책상을 정리하고, 차트를 정리합니다. 그리고 다음 월동의사에게 또다른 1년을 넘겨줍니다. 아마도,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 질것 같네요. 다음에 오는 선생님은 장보고 기지와 아라온 쇄빙선 승선이력이 있으신 대단한 분이 오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사라면 누구나 올 수 있습니다. 관심과 용기가 있는 당신이라면 가능합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꽃이 있는지, 현실과 타협하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당신의 진짜 소망을 잘 찾아 보세요. 그리고,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눈폭풍(블리자드)직후의 남극기지


2022년 세종기지 의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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